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미국 영화) (문단 편집) === 캐스팅 비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AGdTbIxX9p8)]}}} || || {{{#ffffff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캐스팅을 위한 스크린 테스트 ''' }}} || 원작자가 처음 레트 버틀러 역에 꼽은 배우는 [[바실 래스본]]이었다. 그는 셜록 홈즈로 유명한 배우로서 사람들이 상상하는 레트 버틀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배우였고,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클라크 게이블]]을 원했다.[* 그런데 영화 관련 책자나 [[이선영(성우)|이선영]](1번[[성우]])의 영화음악실 같은 라디오 방송에선 원작자가 소설을 쓰면서 클라크 게이블을 레트로 상상하며 썼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이걸로 아는 경우도 많았다.] 클라크 게이블은 대중들의 관심에 부담스러워 했고, 하필이면 바로 직전 남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해서, 거절하려 했으나 [[캐롤 롬바드]]와 결혼하기 위해 첫 아내에게 지불해야 할 이혼 위자료에 쓸 5만 달러라는 당시에는 막대한 보너스 때문에 결국 수락하였다. 그러나 또 문제는 그의 전속 계약을 맺은 [[MGM]] 영화사가 딴지를 거는 통에 셀즈닉은 '''수익금 절반'''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주기로 한 계약을 맺고 나서야 비로소 그를 출연시킬 수 있었다. 참고로 마가렛 미첼은 레트 버틀러 역에 [[그루초 막스]]를 꼽기도 했으나 명백한 조크에 불과하다. [* 항목 보면 알겠지만 이 사람은 '''코미디언'''이다.] 데이빗 O. 셀즈닉은 마가렛 미첼에게 영화 전반에 대한 조언을 구하였고 그녀는 타라의 외관에 대한 비평을 한번 하였으나 무시되자 더이상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촬영 당시 여러 이야기도 넘쳐났는데, 처음 맡던 감독인 조지 큐코어(George Dewey Cukor,1899-1983)는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과의 마찰로 인해 [[빅터 플레밍]]으로 교체되었다. 조지 큐코어는 무척 자상했기에 여배우들에게 상냥했던 반면[* 이에 반해 클라크 게이블은 큐코어가 여배우들에게는 친절할지 몰라도 남자 배우들은 개처럼 취급했다고 회고했다.] [[빅터 플레밍]]은 슈퍼 마초 감독으로 유명했기에 교체 소식을 들은 [[비비안 리]]는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그런데 플레밍도 셀즈닉과의 마찰로 촬영을 중단했는데 셀즈닉이 가소롭다는 듯이 '세상에 감독이 당신밖에 없나?'는 투로 다른 감독을 알아보자 백기를 들고 제발로 찾아와 사과를 하고 다시 감독을 맡았다. '''주연 여배우가 확정되기도 전에''' 촬영을 시작했다. 첫 촬영은 1938년 12월 10일 <더 가든 오브 알라(The Garden of Allah)>(1936)와 <[[킹콩]]> 등 기존 영화의 세트에 적당히 판자를 붙여 실루엣을 만든 뒤 모두 불태우면서 시작되었다. 어차피 기존 세트를 헐고 새로 만들어야 하니, 아예 불태워버리면서 그 상황을 촬영해서 애틀랜타가 파괴되는 장면에 쓴 것이다. 이 화재 장면에만 25,000 달러가 들었으며 촬영 분량은 113분이었다. 옥외 촬영지 5만 평에서 치솟은 불길이 하도 거세서 [[MGM]]이 자리하고 있던 컬버 시티(Culver City) 주민들이 [[MGM]] 전체가 불타고 있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하도 경찰에 하도 신고를 해대서 전화가 먹통이 될 지경이었다. 이때 스칼렛 오하라 역할은 이런 위험한 장면들에 동원하기 위해 미리 캐스팅해뒀던 스칼렛 오하라 전담 여성 스턴트맨들이[* Aline Goodwin과 Lila Finn.] 해냈는데 이들은 본 영화의 촬영 끝까지 함께 했다. 이때 레트 버틀러 역도 당연히 전문 스턴트맨들이 대역으로 동원됐다.[* Yakima Canutt와 Jay Wilsey.]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은 1938년 2월 비비안 리가 출연한 와 를 본 순간 리를 스칼렛 오하라 역으로 점찍고 바로 리의 미국 활동을 담당하는 에이전시에 리의 이름을 스칼렛 오하라 후보에 등록시켜달라고 요청했다. 마침 리의 미국 에이전시 대표는 데이빗 O. 셀즈닉의 형제인 마이런(Myron) 셀즈닉이었다. 1938년 여름 셀즈닉 형제는 리의 전체 연예 활동에 관해 계약을 맺고 있던 영국 제작자 앨릭샌더 코다와 협상을 시작한다. 그리고 12월 10일 셀즈닉 형제와 코다는 첫 대면 회의를 가졌는데, 이 날은 마침 애틀랜타가 불타는 장면을 촬영한 날이었다. 그 뒤 데이빗 O. 셀즈닉은 수차례의 스크린 테스트를 거친 뒤 1939년 1월 13일 리를 스칼렛 오하라로 발표하게 된다. 미쳤다는 소리 들어가면서 이걸 제작한 당시 37살 야심찬 젊은 제작자 데이빗 O. 셀즈닉(1933년판 킹콩도 그가 제작했다.)은 늘그막에 '''내가 뭐하자고 이걸 제작했는지'''라며 자주 중얼거릴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하여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 뒤로 만드는 영화들마다 반드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비교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이후에 제작한 영화들이 듣보잡은 아닌데 바로 영국영화 [[제3의 사나이]]를 공동 제작하고 [[알프레드 히치콕]]의 미국 진출작인 [[레베카(1940)|레베카]], [[무기여 잘 있거라]](1957)를 제작했듯이 결코 제작한 영화들이 듣보잡이 아닌 수작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름 흥행작도 있어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지만 사생활 문제로 마음도 편치 않아서인지 도박과 폭음으로 인하여 1965년 63살로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데뷔 전에 스칼렛 오하라와 레드 버틀러의 딸 역할을 제의 받은 적이 있다. 딸의 연예계 데뷔를 아직 부정적으로 생각하던 테일러의 부모님이 거절해 무산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